2024~2025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에 참가 중이던 산둥 타이산이 돌연 기권을 선언했다. 그것도 리그 스테이지 최종전을 2시간 남겨둔 상황에 이런 발표를 했다. '선수단 컨디션'를 이유로 들었다. 이미 탈락이 결정됐음에도 유종의 미를 준비하던 홈팀 울산HD 뿐만 아니라 아시아축구협회(AFC) 관계자, 양팀 팬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경기 당일 컨디션 문제는 모든 팀이 숙명처럼 달고 다니는 문제. 갑작스럽게 부상자가 나오더라도 후보 선수를 내세워 경기를 치르는 게 상대 뿐만 아니라 승부, 대회에 대한 예의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상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게 클럽의 의무. 산둥은 이를 '기권'이라는 가장 편안한 방법으로 헌신짝 취급했다.
일각에선 산둥이 정치적 문제에 엮이는 걸 경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중국 주추바오의 리쉬안 주임은 '산둥 홈 팬이 전두환 사진을 들어 보인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둥이 굳이 원정까지 나서서 기권한 건 지난 사건으로 인해 한국 팬들이 보복 조치를 취할 가능성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고 추측했다. 중국 내부에서 껄끄러워 하는 역사적, 정치적 이슈를 울산 팬들이 건드릴 것을 우려했다는 뜻.
'도둑이 제발 저린 셈'에 지나지 않는다. 징계 사안인 정치적 이슈를 굳이 울산 팬들이 들고 나올 이유가 없고, 그런 움직임도 관측되지 않았다. 설령 그런 문제가 불거졌다면, 산둥이 그때 경기장 내에서 벌어진 정치적 이슈를 걸고 넘어가면 되는 것. 경기 직전, 그것도 국제 대회에서 '남의 집'까지 찾아와 선언한 기권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산둥이 벌인 해프닝으로 ACLE는 확대 출범 첫 해부터 권위에 금이 갔다.
AFC는 기존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를 유럽챔피언스리그와 비슷한 시스템으로 확대 개편하고 상금 규모를 크게 늘려 아시아 최고 클럽 대항전 권위를 끌어 올리고자 했다. 이럼에도 산둥이 기권을 선언하면서 '빠져도 되는 대회'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 가을부터 국내 리그 일정과 병행하며 대회를 준비하고, 겨우내 구슬땀을 흘린 다른 참가팀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중국 클럽들의 문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코로나19 시절엔 자국의 봉쇄 정책을 이유로 ACL에 22세 이하 유스팀을 출전시켜 논란이 된 바 있다. 이긴 팀은 껄끄럽고, 대회 운영 주체인 AFC는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동아병부(東亞病夫)'로 불렸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면서도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마약에 취해 무너지는 제국의 모습은 처연함을 넘어 냉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병폐는 여전해 보인다. 적어도 축구만큼은 그렇다. 축구굴기를 내걸고 황사머니로 전세계 스타를 블랙홀처럼 쓸어 담더니, 부동산 침체 이후 매년 해체팀이 나오고 있다. 프로 클럽이 지향해야 할 내실이나 자생력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컵'을 노래하고 있지만,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젠 국제대회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기권을 선언하는 촌극을 벌이고 있다.
'축구판 동아병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