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마지막 A매치 유종의 미 실패
한국(FIFA 랭킹 22위)과 팔레스타인(100위)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6차전이 열린 19일 요르단 암만 국제 경기장. 양 팀 선수들은 전반 시작 전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전쟁에서 발생한 희생자에 대해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불안한 정세 탓에 팔레스타인은 이날 홈경기를 인접 국가 요르단에서 치렀다. 팔레스타인 교민 1000여 명이 쉬지 않고 열띤 응원을 펼쳤다.
팔레스타인 선수들은 이에 고무됐는지 초반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전반 12분 김민재가 뒤로 내준 패스가 짧았고, 골키퍼 조현우가 쇄도하는 팔레스타인 공격수 제이드 쿤바르를 의식한 듯 제대로 공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 순간 쿤바르가 몸을 돌리며 찬 공이 조현우 다리 사이를 지나 텅 빈 골문으로 굴러갔다. 경기장은 팔레스타인 팬들 함성으로 뒤덮였다. 이 분위기를 바꾼 건 역시 ‘캡틴 손’. 4분 뒤 왼쪽 측면에서 이명재가 안쪽으로 찔러준 패스를 이재성이 수비수 사이로 침투하는 손흥민에게 내줬고, 손흥민은 이 공을 몰고 가 페널티박스 왼쪽 지역에서 오른발 슈팅해 골문 오른쪽 구석에 꽂았다. 손흥민의 A매치 통산 51호 골. 황선홍 대전 감독을 넘어 역대 득점 2위에 올랐다. 1위는 58골의 차범근 전 감독이다.
한국은 후반 들어 공격 고삐를 더 조이며 역전 골 사냥에 나섰지만, 번번이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1대1 무승부. 지난 1차전 홈경기 0대0 무승부에 이어 또 한 번 조 최하위 팔레스타인에 발목이 잡혔다. 홍명보 감독은 “강한 조직력을 가진 팀이 수비 위주로 나섰을 때 결정력을 끌어올리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한국은 이날 74% 볼 점유율을 가져가며 16개 슈팅과 8개 코너킥을 시도했으나 한 골에 그쳤다.
B조 선두인 한국은 승점14(4승 2무)를 기록, 2위 이라크(승점 11·3승 2무 1패)에 승점 3 차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라크는 오만을 1대0으로 제압했다. 조 1~2위가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는 가운데 그나마 3위 요르단(승점 9)이 5위 쿠웨이트(승점 3)와 1대1로 비긴 게 다행이었다. 한국은 내년 3월 오만, 요르단과 홈 2연전으로 3차 예선 7~8차전을 치른다.
아시안컵 4강 탈락,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경질,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 감독 선임 절차 논란 등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낸 한국 축구는 홍 감독 부임 이후 연승 가도를 달리며 안정을 찾는 듯 보였으나 팔레스타인전 무승부로 올해 마지막 A매치 일정을 개운치 않게 마무리했다. 홍명보호는 1~6차전 4승 2무를 거두는 동안 12골을 터뜨리면서 7명이 골 맛을 보는 등 득점원이 다변화된 건 소득으로 꼽힌다. 하지만 5골이나 실점하면서 수비 불안을 노출했다. 4~6차전에서 매 경기 실점했다. C조 선두 일본(22득점 2실점)과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팔레스타인전 실점 장면에선 수비의 중심 김민재가 흔들리면서 후방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앞선 과정에서 동료들이 공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게 1차 원인이 됐다.
공격에선 이강인의 침묵이 아쉽다. 올 시즌 파리 생제르맹(PSG)에서 6골로 프랑스 리그 득점 공동 4위에 올라 있는 이강인은 홍명보호에선 6경기 연속 득점이 없다. 오만과 2차전에서 손흥민 골을 도운 것이 유일한 공격 포인트. 올해 상반기 아시안컵 3골을 포함해 6골을 기록했던 때와는 다른 모양새다. 월드컵 본선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이강인 활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전에서 오른쪽 날개로 나온 이강인은 활발한 공간 침투보다는 측면에서 왼발 크로스를 반복해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9개 크로스 중 2개만 동료에게 전달됐다. 이강인은 “PSG와 대표팀은 다르다”라며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손흥민은 이날 유효 슈팅 4개를 날리는 등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비며 경기 MVP에 선정됐다. 후반 36분 황인범 패스를 받아 골키퍼 다리 사이로 슈팅해 골망을 흔들었으나 간발의 차로 오프사이드가 선언된 장면은 아쉬웠다. 15년째 국가대표로 뛰는 그는 이날 131번째 A매치에 나섰고, 내년엔 이운재(133경기)를 제치고 3위로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은 “올해 아시안컵부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2~3%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린 듯하다”며 “언젠가 대표팀을 떠나야 할 때 100% 만족하는 자리까지 만들어 놓고 은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